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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1

떵꼬 2024. 11. 23. 08:36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
삶은 고해(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석가는 四海 가운데서 삶을 가장 큰 苦海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 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苦海)가 아니 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 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 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어렵다는 이 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대수롭지 않으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와 어려움이 가혹하다고 불평을 하 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문제만 가장 특별하다고 믿으며, 왜 다른 사람들은 당하지 않는데 자신과 가족이나 자신이 속해 있 는 집단만 이같이 고통스런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불평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리라 믿 는다.

삶이란 문제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 통스런 삶의 문제들을 계속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걸까? 아니면 이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삶의 지혜들 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훈련이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방법 중의 하나다. 이런 과정 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가 없다. 미약한 배움으로는 부분적인 문제밖에 해결하지 못하며 혼신의 힘을 다한 배움만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삶의 문제에 직면해서 해 결하는 과정은 삶 그 자체의 어려움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삶의 문 제들은 우리를 괴롭고 비참하게 만들거나 외롭고 슬프게 하기도 하 며, 때로는 죄책감, 분노, 두려움, 초조, 절망 속으로 던져 넣기도 한 다. 삶의 문제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육체적으로 불편하고 아픈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불편하고 아프게 한다. 우리가 삶의 문제들을 문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렇듯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끊임없이 계속되므로 삶이란 항상 어렵고, 기쁨만큼이나 많은 고통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전체적인 과정 속에 삶의 의미 가 있다. 삶의 승패는 그 문제들을 얼마나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문제들은 우리에게 용기와 슬기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없던 용기 와 슬기를 만들어 내게까지 한다. 영적으로 정신적인 성장은 오직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성장을 자극하 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과 도전적인 태도를 격려해야 된 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일부러 문제를 내주고 풀어 보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제에 부딪쳐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가운데 배우게 되는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 대로 "고통은 가르침을 준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 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환영하며, 더 나아가서는 문제가 주 는 고통까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고통을 두려워하고, 가능한 한 문제들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는 문제를 질질 끌면서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란다. 무시 하거나 잊어버리려 하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려 한다. 심지어 는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약물을 먹고 자신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문제들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 나려고만 한다. 그러나 문제와 고통을 피하려는 이 태도가 바로 정 신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러한 경향을 가 지고 있으므로,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사람은 드물며 누구나 어느 정도는 문제가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문제와 고 통스러운 것을 피해 쉬운 길을 찾으려다가 오히려 건전하고도 지 각있는 길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스 스로 만든 환상에만 안주하여 현실을 도피하기도 한다. 칼 융(Carl G.Jung)은 이것을 "노이로제(신경증)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 을 회피한 결과다." 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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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피하려고 했던 바로 그 고통보다도 피하려 고 하는 마음이 더 고통스럽게 된다. 신경증 자체가 가장 큰 문제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통과 문제들을 회피하려 하는데, 이 는 신경증을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 행히도 어떤 사람들은 용기있게 신경증에 직면해서-보통은 정신 치료의 도움을 받아서 어떻게 이 힘겨운 고통을 겪어 내야 할 것 인가를 배우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든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하며, 그때 생겨나는 고통을 회피한다는 것은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 면 만성 정신질환 상태에서 정신적 성장은 정지하게 되며, 이것을 치료하지 않으면 인간 정신은 시들어 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녀들의 정신적, 영적 건강을 성취할 수 있 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리 자신과 자녀들에게 고통을 겪는 것이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 과, 문제들을 직접 당면해서 고통을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 실을 가르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삶의 문 제를 직면하여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고 또 그 과정에서 성 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과 자녀들이 스스로 이러한 가르침을 체득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을 감내하고 성장하는 방법을 배 울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방법이란 어떤 것이고, 고통을 이겨 내는 슬기로운 기술이란 어떤 것이며, 고통스런 문제들을 건전하게 겪어 내는 수단이란 어떤 것인가? 이를 '배움'이라 불러도 될까?

이것을 이루어 내는 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기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는 것, 책임을 자신 이 지는 것, 진실에 헌신하는 것, 그리고 균형을 맞추는 일이라고 하 겠다. 이러한 기술들은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 엄청난 노력이 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이들은 단순 한 방법이어서 열 살 가량의 아이들도 이 기술을 숙달시킬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권세있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방법들을 잊어버 려, 인생에서 쓰라린 경험들을 하곤 한다. 그것은 이 방법들이 복잡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고자하는 의지 때문이다. 이 방 법은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직접 마주하는 기술이며, 만약 마땅히 겪 어야 할 고통을 피하려 한다면 이러한 기술의 사용을 피하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이러한 방법들을 하나씩 설명해 본 다음에 이것을 사 용하고자 하는 의지에 관해 생각해 보자. 나는 이 의지를 '사랑'이 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곧 "당연히 후로스팅을 먼저 먹죠." 
케이크 먹는 버릇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그녀의 일 버릇을 검토해 보았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그녀는 언제나 주어진 시간 중에서 맨 처음 한두 시간에는 즐거운 일을 반쯤 미리 해치우고, 나머지 여섯 시간은 지겹고 하기 싫은 일들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두 시간에 재미없는 일들을 억지로라도 먼저 해치우고 나머지 여섯 시간은 자유롭게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충고해 주 었다. 그녀도 스스로 공감하고, 예전의 버릇을 바꾸었다. 그 결과 더 이상 일을 질질 끌지 않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근본적으로 강한 의 지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본다.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룬다는 것은 하루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괴로 운 일과 즐거운 일을 계획적으로 짜되, 고통을 먼저 겪은 뒤 즐거움 을 갖게 되면 그 즐거움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 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렇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기술을 우리는 아주 어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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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할


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심지어 다섯 살짜리도 그런 기술을 활용하 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 재미있는 놀이를 할 때 친구에게 먼저 하라고 하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자기 차 례가 왔을 때 기다린 만큼 더욱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음을 아는 것이 다. 여섯 살쯤 되면 케이크를 먹을 때 맛없는 부분을 먼저 먹고 맛있 는 부분을 나중에 먹을 줄도 안다. 초등학교에서는 즐거운 일을 뒤 에 하는 습관을 조직적으로 훈련받게 되는데, 예를 들어 숙제하는 일 같은 것이다. 열두 살쯤 되면 엄마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숙제 를 먼저 해치운 다음 텔레비전 앞에 앉을 줄 안다. 열다섯이나 열여 섯 살쯤 되면 이런 행동은 당연히 몸에 밴 생활습관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청소년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이 나이의 많은 청 소년들이 그러한 행동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쉽고 편한 일을 제쳐 놓을 수 있는 역량을 잘 발달시 킨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열다섯, 열여섯 살이 되어 도 그런 능력을 기르지 못해 문제학생이 되고 만다. 보통 혹은 그 이 상의 지적 수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나쁜 것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을 빼먹는다든지 결석을 마음 내키 는 대로 한다든지, 순간적인 느낌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학 생들은 이 다음에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아이들은 싸움에 자주 끼어들기도 하고, 약 물(마약류)을 남용하는 등의 문제로 경찰에 끌려가게 되기도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어서 이렇게 놀다가 결국은 심리 상담가나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게까지 된다. 그러나 이 지경에 이르면 대

개는 때를 놓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청소년들은 흔히 자기들의 충 동적인 생활양식에 개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항을 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가 우호적이며 이해심 많은 태도로 그 반항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도, 충동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면 치료 과정을 뜻있게 밟아 나갈 수가 없어 일찌감치 중단하게 되어 버리 는 수가 많다. 이들은 의사와의 면담시간 약속도 어기고, 마침내 치 료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아이들은 결국 학교에서 정학 이나 퇴학을 당하게 마련이고, 실패의 연속인 삶을 살아가게 되며, 때에 따라서는 파혼에 이르는 결혼생활을 하거나 사고를 저지르고 정신병원 또는 교도소 생활에 말려들어 가기도 한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왜 대다수의 아이들은 즐거운 일들 을 뒤로 미룰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는데, 어떤 아이들은 잠재 력을 지녔으면서도 그 능력을 성장시키지 못했는가? 이에 대한 절 대적이고 과학적인 답은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다. 유전적인 요소 가 작용한 결과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이와 관련된 많 은 연구 자료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의 양 육방식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정답이다.

부분에 가서 검토해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부분적이긴 하나 사랑에
관해 설명을 하고, 그것이 훈련과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언급하겠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가치있는 것이 되고, 그것이 가치가 있게 될 때, 우리는 거기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것 을 즐기며 보호하게 된다. 자신의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춘기의 청 소년은 너무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차를 닦아 광을 내며 수 선할 것이다. 정원 가꾸는 일을 사랑하는 노인도 그의 시간 대부분을 꽃을 다듬고, 거름을 주며 연구하는 데 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이들을 사랑할 때에도 즐겁게 그들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내줄 시간이 없고 그럴 마음도 없으면, 아이들을 가까이 관찰할 수 없기 에 언제 부모의 가르침이 아이들에게 필요한지도 모르게 되고, 또 그런 도움을 원하는 아이들의 무의식적인 표현을 부모가 제대로 알 아차릴 수도 없게 된다. 아이들을 단단히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뼈 저리게 의식하면서도 우리는 "오늘은 애들을 봐줄 기력이 없어." 하 며 저희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수가 많다. 그러다가 결국 아이들이 잘못되면 그때서야 부모들은 화를 내며 아이들을 가혹하 게 야단치게 된다. 문제가 어떤 것인지 알아볼 여가도 없고, 그 문제 에 대해서 어떤 방법으로 교육을 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작정 훈련시키려고 덤비게 되는 것이다.

보통 때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서 돌봐 주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 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게 달래고 염려해 주며 가르친다면 아이들은 순순히 호응을 해서 부모들이 장려하는 것이나 질책하는 것을 듣 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여 그대로 따라 줄 것이다. 이런 부 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케이크를 어떻게 먹는가도 살펴보고 어떻게 공부하는가도 관찰해 보며, 언제 살짝 거짓말하는가, 언제 문제들 에 부딪치고도 해결하지 않고 도피하는가도 알게 된다. 그런 부모 들은 시간을 내서 아이들의 얘기를 들으며 사소한 문제들을 고쳐 주기도 하고, 문제에 따라 대응해서 약간 조이기도 하고 느슨히 풀 어 놓아 주기도 하며, 얘기를 해주든지, 감싸 안아 주기도 하고 키스 해 주기도 하고, 훈계를 하거나 등을 툭툭 쳐 격려해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넘치는 부모들의 훈육방식은 사랑이 없는 부모 들의 훈육방식보다 질적으로 월등히 낫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넘쳐나는 사랑으로 틈틈이 아이들을 관찰하여 그들이 무 엇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 볼 때, 부모는 진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며 괴로움을 나눌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이런 것을 아주 모 르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자기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 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당장에 고마움을 표현하지는 않을 지라도 마음 속 깊이에서 부모가 얼마나 함께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 배우게 된다. 그들은 "우리 부모가 기꺼이 나와 함께 고통을 당해 준다면 고통이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것 이고 나도 기꺼이 그 고통을 견뎌 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자기 훈련의 시작이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보내는 시간, 그것이 바로 아이들이 부 모로부터 얼마만큼 귀중하게 취급받고 있는가를 가늠하게 해준다. 사랑이 없는 부모들은 자기들의 사랑이 부족한 것을 감추려고 아이 들에게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아이들을 소중 히 여긴다고 느끼게끔 하고는 있으나 애정에 가득 찬 마음으로 아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주지는 않는다. 자녀들은 결코 그런 말들에 속지 않는다. 부모들이 사랑한다고 믿기를 원하므로 의식적으로 그 말에 집착하기도 하나, 무의식적으로는 부모들이 말로만 그럴 뿐 진심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와 반대로, 진실로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불쾌한 순간들 을 겪을 때 부모가 자신을 잘 돌봐 주지 않는다고 의식적으로 느끼 고 불평을 할지라도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매우 가치있고 중요한 일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소중히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그들 자신의 마음 깊이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자기들이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는 느낌은 정신건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며, 자기 훈련의 주춧돌이다. 이것은 부모 사랑의 직접적인 산물이 다. 이러한 신념은 어렸을 때 얻어져야만 한다. 어른이 되어서 얻는 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통 해 자신들이 귀중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른이 되어 파 란과 곡절을 겪더라도 그러한 정신은 파괴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중하다고 느끼는 그런 감정이 자기 훈련의 주춧돌이 된다고 했는 데, 자신이 귀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를 돌 보고 가꾸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 우리가 지금 즐기는 일을 뒤로 미룬다든지, 시간을 짜서 일을 순서있게 하는 것을 논하고 있으므 로-시간에 대한 것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우리 자신이 귀중하다 고 생각하면, 우리의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쓰고 싶게 된다. 일을 질질 끌던 경리사원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자기의 시간을 중 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었다. 시간을 귀하게 여겼더라면 자신의 하루를 그렇게 불쾌하고 비생산적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다. 그녀의 부모들이 조금 만 성의가 있었다면 그녀를 잘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방 학만 되면 그녀를 아이들을 돌봐 주는 시골 캠프 비슷한 데로 보내 곤 했던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어린 딸을 소중하게 돌봐 주지 않았 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가치없는 존재라고 느꼈고 자신을 잘 가꾸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훈련시킬 가치가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녀가 분명히 지적이고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훈련 에 있어서는 아주 저급한 초등학교 교육 수준으로 보이는 이유는 자기 자신과 자기 시간을 존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가 자신의 시간이 귀중하다고 지각할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시간 을 계획적으로 짜기를 원하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최 대한 유용하게 쓰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행복한 아이들은 성년 기에 들어서도 그들 자신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내적 안정감을 깊이

야기한 경리사원의 경우처럼 사랑의 결핍과 같은 형태로 부모들로 부터의 버림을 경험하게 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버림받지 는 않았어도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지 않을 거라는 재확인을 받지 못 한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버리고 간다'는 위협을 공공연하게 사용하곤 한다. 그런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주고
자 하는 의미는 대개 이런 것이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 을 테야. 그게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알겠지? 자, 그렇다면 이제 네 가 해야 할 일은 뭐지?"
이런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때 오는 결과가 무엇일까? 어 린아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버림받는 것이고,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을 조종하고 지배하려고 사랑을 희생 시키는 것이고, 그 대가로 아이들은 장래에 대해 엄청난 공포심을 갖게 된다. 이런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늘 버림받았다고 느끼기도 하며 세상이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믿음 없이 성인 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오히려 세상이란 위험하고 무섭다고 인식 하게 되고, 현재의 어떤 즐거운 일이나 안전한 일을 미래에 약속된 어떤 즐거운 일이나 안전한 일을 위해 결코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란 참으로 의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이들에게 즐거운 일들을 나중에 할 수 있 는 능력을 길러 주려면, 부모 자신이 자기 훈련이 잘된 역할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기 존중감, 자기들의 실존 에 대한 안전감을 가지게 하려면, 부모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함

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있고 변함없는 진지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선물이다. 이런 선물을 부모로부터 못 받는 경우 에는 다른 데서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그것들을 획득하 는 과정이란 항상 힘에 부치는 투쟁의 과정이 되고, 때에 따라서는 평 생이 걸리기도 하며, 혹은 평생 걸려서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 해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부모들의 사랑이 충만하거나 결핍될 때 그것이 아이 들을 양육하는 데 주는 영향을 살펴보았으며, 특히 즐거운 일을 뒤 로 미룰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데 사랑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함 을 알아보았다. 그러면 여기서는 이 즐거운 일을 나중에 하도록 훈 련시키는 데 문제가 있을 경우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들 대부분은 다행히도 즐기는 일을 뒤로 지연시킬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길러서 고등학교나 대학을 마치고 감옥에 붙잡혀 간 적 없이 성년기에 들어서긴 했어도, 우리가 길러 온 역량은 대체로 불완전하고 미숙하다. 그러므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 또한 아직 불완전하고 미숙하다.
서른일곱 살에 이르러서야 나는 겨우 물건 수리를 어떻게 하는가 를 알게 되었다. 그전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배관 수리라든지 장

난감을 고치는 일, 상자에 담겨 오는 가구들에 대해 그 설명서 쪽지 만 믿고 맞추는 일이 고작이었는데, 그것도 나중에는 혼란스러워하 면서 끝마무리도 짓지 못한 채 포기하곤 했었다. 의과대학을 제대 로 마치고 다소 성공적인 정신과 의사로서 가정을 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신이 수리하는 데는 전혀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 다. 심지어 내 유전인자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어떤 자연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기라도 해서 내게는 선천적으로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특질이 유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서 른일곱 살이 끝나 가던 무렵, 어느 봄날의 일이다. 일요일에 산책을 하고 있는데 이웃집에서 풀 깎는 기계를 수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인사를 했다.
"참장하시오. 나는 그런 종류의 일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데." 그런데 이웃 친구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퉁명스럽게 쏘아 붙이는 것이었다.
"시간을 들여 해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뭐."
마치 도사처럼, 단순하고 아무런 주저도 없이 정확하게 말하는 그의 대답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산보를 계속했다. '그 사람 말이 맞지, 그렇지? 하고 나는 자문해 보았다. 어쩐지 그것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조그만 수 리를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되살아났다.
어떤 환자의 자동차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움직이지를 않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무엇을 잠깐 만지기만 하면 곧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게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

는 차 앞자리의 바닥에 누워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천천 히 시간을 들여 어떻게 된 것인가 살펴보았다. 몇 분을 들여다보았 다. 먼저 줄들과 튜브와 연결 막대들이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이 보였 다. 나는 도무지 그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브레이크 기계장치를 눈여겨보니, 곧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지를 알아볼 수가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기에 조그만 걸쇠 가 있었는데 그것이 브레이크가 풀리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이 분명 했다. 이 걸쇠가 어떻게 된 것인가 천천히 궁리해 본 결과 손가락 끝 으로 그것을 위로 올리면 쉽게 움직여서 브레이크를 풀어 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해보았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손가락 끝으로 누름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나는 최상급 수리공 이 된 것이다. 실제로 나는 기계 수리를 할 만한 지식도 없었고 그걸 배울 시간도 없었다. 사실 나는 내 시간을 기계 만지는 일이 아닌 다 른 일에 투자해 왔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수리공에게 뛰어가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된 것은 단순히 내 선택의 결과일 뿐, 내가 벌을 받아서라든 지, 유전인자에 결함이 있어서라든지, 혹은 처음부터 무능해서 그 런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시간을 들여서 해볼 마 음만 있으면 무슨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기계 고치는 데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수리공으로서 역량이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들이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그들이 인생에서 필요한 지적이며 사회적이고 영적인 많 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을 들여 해보라는 이웃집 친구의 충고를 듣기 전이었다면, 아 마도 나는 내 환자의 자동차 계기판 밑에 내 머리를 어색하게 들이 대고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여러 가지 줄들을 대충 잡아당 겨 보고는 쉽게 손들어 버렸을 것이다. "이건 도저히 내가 할 수 없 "어."하고 고개를 저으며 말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매일매 일 삶의 다른 문제들을 이런 식으로 접한다. 앞에 말한 경리사원을 보면, 그녀는 근본적으로는 사랑이 많고 헌신적이지만, 두 어린아 이에게는 무능한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주의 깊게 관심을 쏟고 있어서 그들에게 어떤 심리적 문제가 생겼을 때나 자기가 아 이를 기르는 데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을 때에는 금방 알아챈다. 그 러나 그럴 때 그녀가 아이들에게 취하는 대응이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일상습관을 바꾸게 하는 정도이다. 즉 애들에게 아침밥 을 더 많이 먹인다든지 혹은 일찍 잠자리에 들게 한다든지 하는 것 이다. 그런 조치들이 아이들의 문제행동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다음 그녀는 치료 시간에 나에게 와서는 실망해 가지 고 "나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지요?"라고 한 다. 그녀는 냉철하고 분석적인 능력이 뛰어나서, 일을 질질 끌지 않을 때에는 자기 직장에서 복잡한 일들도 곧잘 해결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문제를 당했을 때에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행 동했다.
문제는 시간에 있다. 일단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기만 하면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면서 즉각적으로 문제를 해결 해 버리려고 한다. 그녀는 문제를 분석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불안감을 견뎌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문제를 해 결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어서, 이 일을 단 몇 분도 지체할 수가 없었 다. 그 결과 그녀의 성급한 해결책은 부당하기가 일쑤였고, 그래서 그녀의 가족들은 만성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 자신이 인내심을 가지고 치료를 꾸준히 받아, 차츰 가족 문제 를 분석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내어 심사숙고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에는 효과적인 해결 방법들을 찾을 수 있 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은근슬쩍 드러나는 작은 결함들이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라 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경리사원의 경우는 우리 모두의 모습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가 가정에서 아이들 문 제나 긴장되는 삶의 문제들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해결하려고 노 력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자기 훈련이 잘된 사람이라도 가 족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내 능력 밖이야. 어쩔 도리 가 없어."라고 한번쯤 포기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시도하기도 전에 체념해 버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즉각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서두르다가 적절치 못한 시도를 하는 것보다도 더 어리석고 파괴적인 것이다. 그러한 패배의식은 누구에게서나 나타나고 있고 세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다. 이는 문제가 저절로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태도이다.
한 조그마한 마을에 집단치료에 참여하는 서른 살의 총각 외판사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3개월 후에 그 은행가는 외 판사원과 자기 부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알게 되었고 예상했던 대로 분개했으며, 그로 인해 집단치료도 그만 두고 말았다. 집단 멤 버들이 그의 파괴적인 행동에 대해 문제를 삼자, 그 외판사원은 이 렇게 말했다.
"그 얘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시끄럽고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까를 상상하니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들었어요.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으면 언젠가는 문제가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문제란 그대로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문제들은 직면해서 해결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남는 것이며, 영원히 정신적인 성장과 발전의 장애물이 되고 만다.
39

있다
고 장담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2월 초에 더 이상 치료 비용을 낼 수 가 없어 집단치료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전 한 푼 없
이 망해서 다른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5개월 동안 그는 통틀어 8개의 가구만을 수리했을 뿐이었다. 왜 미리 다른 직장을 찾아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8주 전에 나는 내 돈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지경에까지 이르리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게 절박 하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아, 참 이젠 정말 절박하군요."
그는 당면한 문제를 또다시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문제를 무시해 버리는 그의 문제를. 그는 이러한 문 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며, 어떤 치료도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임을 인식했다.
문제를 무시해 버리는 이러한 태도는, 다시 말해 즐거운 일을 뒤 로 미루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직면
아직도
가야 할


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될 상태에 이 르기 전에 미리 기꺼운 마음으로 고통스런 문제를 대면하는 것은 즐거운 일들을 나중으로 제쳐 놓는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앞으로 즐거운 일을 즐기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현재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외판사원의 경우, 그가 이렇게 환히 보이는 문제들을 무시했던 것은 심리적으로 미숙했거나 정신적으로 나약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이러한 모습은 그 사원만이 지닌 특징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도 그와 같은 미숙함과 나약함이 숨겨져 있다.
한 육군 참모총장이 내게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군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참모들이나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문 제를 가만히 앉아서 들여다보고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문제들이 저절로 사라질 것처럼 생각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장군은 정신적으로 약하거나 정신장애를 지닌 사람에 대해 이 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유능하다고 인정받고 군대에서 철저히 훈련을 받은 능숙한 여러 대령과 장군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도 이와 같은 지휘관에 비유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부모 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낼 만한 준비가 부족하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할은 회사운영만큼이나 복잡하다. 그런 데 대개의 부모들은 앞서 말한 군대의 지휘관들처럼 아이들에게 무 슨 문제가 있거나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책임진다는 것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삶의 문제들을 그때그때 해결 해 나가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이런 얘기는 말 같지도 않은 뻔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문제들을 해결하 기 전에 먼저 그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 하는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다른 사 람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 오로 지 "이것은 내 문제이고, 이를 해결하는 것도 내게 달렸다."고 말할 때에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문제는 다른 사람들, 혹은 내가 조 정할 수 없는 사회적 상황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가 나를 위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로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자기 문제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자기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 게 비참해하거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책임지는 것을 피하려 하고

노이로제와 성격장애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대개의 환자들은 모두가 노이로제(신경 증)가 아니면 성격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더 간단히 말해서 이 두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은 책임지는 것에 대해 병적 장애를 가 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삶의 문제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이들은 서 로 상반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너무 책임을 지려 하고, 성격장애인 사람들은 응당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신경증 환자들은 세상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 자기들에게 잘 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격장애의 사람들은 세상과 대결할 때 세상이 잘못됐다고 치부해 버린다.
내가 앞서 예로 들었던 두 사람은 모두 성격장애에 속한다. 즉 직 업군인의 경우 그는 술 마시는 문제를 오키나와 탓으로 돌리고 자 기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부인의 경우도 역시 자신의 고독 한 상태에 대해서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키나와 섬에서 외로움으로 인해 신경증을 일으켰 던 다른 한 부인은 이렇게 호소했다.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힘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신경증인 사람들은 성격장애인 사람들에 비해 쉽게 치료된다. 왜 냐하면 그들은 어려움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치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신경 증보다 다루기가 더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인 정하려 하지 않고 자기 자신보다도 오히려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격장애자들은 자신을 분석·진단할 필요를 인식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신경증과 성격장애를 둘 다 가지고 있는 데, 이들을 '성격신경증 환자' 라고 한다. 이들의 특징은 삶의 어떤 부분에서는 참으로 자기들의 책임도 아닌데 책임을 지려 함으로써 죄책감에 휘말려들게 되고, 그 반면에 다른 부분에서는 자기들을 위한 현실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사람들은 일단 정신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얻게 되 면, 그들 성격 중 신경증 부분을 적절하게 격려해 줌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는 행동을 교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들 대부분도 어 느 정도의 신경증이나 성격장애는 피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누구든지 진지하게 치료 과정에 참여할 용의만 있다 면 정신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매일매일의 일상사 중에서 우리의 책임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 우리 책임 밖의 것인가를 분간하는 문제가 인간 실존의 가장 큰 문제인데, 그것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

기 때문에 이런 책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이런 책임을
받아들이는 한 그들은 신경증 환자가 될 위험성이 크다.
이런 식으로 성격장애의 부모들은 또 다른 성격장애나 신경증의 아이들을 낳게 된다. 부모들이 자신의 죄를 자녀들에게 돌린다는 것은 결국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격장애자들은 똑같은 성격 특징을 결혼생활이나 친구관계에 서, 그리고 사업관계에서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들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이미 말 한 것처럼 어떤 문제이든 문제의 주체인 당사자가 이 문제에 대하 여 책임을 지기 전까지 그 문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
성격장애자들이 자기들 문제에 대해 외부 배우자, 자녀, 친구, 부모, 고용인, 환경, 학교, 정부, 인종차별주의, 남녀차별, 사회제도 -로 책임을 돌리며 비난하는 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며,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기들의 책임을 내던져 버림으로써 그들 자신은 편안할지 모르나 삶의 문제를 해결 하는 일을 포기함으로써, 영적 성장이 멈추게 되고, 사회는 쓸모없 는 짐만을 떠안은 꼴이 되고 만다. 결국 성격장애자들은 자기들의 고통을 사회에 던져 주는 것이다.
"네가 문제 해결에 참여하지 않으면 네가 문제의 일부가 되고 말 것이다."라는 격언에 주목하라.

현실에 충실하자
우리의 삶이 건실하게 되고 정신의 성장을 이루게 하는 세 번째 방법은 바로 진실에 충실하는 것이다.
진실이란 현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거 짓은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의 현실을 보다 명확히 볼수록 우 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보다 나은 준비를 갖추게 된다. 우리가 세 상의 현실을 보는 눈이 불투명할수록 우리의 마음이 허위, 착각, 환상에 의해 혼란스러워질수록-바른 행동을 하기 위한 현명한 결 정을 하게 될 가능성은 점점 작아진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란 지도(地圖)와 같아서 그걸 지표로 삶의 모든 영역을 판단하게 된다. 만일 지도가 참되고 정확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고, 어떤 곳에 가야 할 때는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지도가 거짓이고 부정확하다면, 길을 잃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 모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도 대개의 사람들은, 정도의 차 이는 있지만, 이를 무시해 버린다. 그 이유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가

는 길이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도를 가지 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지도를 만드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을 감수하고 파 악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지도는 정확하게 될 것이다. 그 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 은 청소년기 말에 그만 정지해 버리고 만다. 그들의 지도는 조그맣 거나 대강 그려져 있으며, 세상에 대한 견해란 협소하고 오해로 가 득 차 있다. 중년 말기에 가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노력을 기울 이지 않는다. 그들의 지도가 완전하고, 그들의 세계관이 정확하다 고(신성불가침일 정도로까지) 확신하여, 새로운 정보에 대해 더 이상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지친 듯이 보인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다행스럽게도 죽을 때까지 현실의 미궁을 탐색하여 세계에 대한 이 해와 진실이 무엇인가를 더욱더 넓히고 정리하며, 재정리하고 있다. 지도 제작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 작해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정확해질 때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지도를 고쳐 그려야 한다는 데 있다. 현실은 계속해서 변 화하고 있다. 빙하들도 오가고, 문화들도 흥망성쇠하며, 산업기술 도 쇠퇴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보다 극적인 것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관점도 계속해서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 렸을 때는 어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무력했었다. 어른이 됨으로써 우리는 힘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병이 들거 나 허약하고 노쇠해져서 우리는 다시 무력해지고 의존할 수밖에 없 어진다. 우리가 돌봐 줄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을

때와는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같은 아이라도 그 성장 과정에 따라 세상은 또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또 가난할 때는 부유하게 살 때와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매일 현실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 한 새로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새 정보들을 종합·흡수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도들을 수정해야만 하고, 새로운 정보가 충분히 축적될 때에는 본격적인 개정을 해야만 될 때도 있다. 수정을 한다든지, 특히 본격적인 개정 을 하는 과정이란 괴로운 일이고 고문받는 것처럼 몹시 괴롭다. 이 속에 인류의 많은 정신질환의 주요한 근원이 놓여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애쓰고 노력해서 유용하고 쓸 만한 지도를 만들어 지니 게 되었는데, 그가 가진 견해가 잘못되어서 지도의 대부분을 다시 그려야만 하는 새로운 정보에 당면하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 런 작업은 대단한 고통이 요구되므로 공포와 두려움에 질려 버릴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대개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정보들을 무 시해 버리려 한다. 이 무시하려는 행위는 아무 것도 안하려는 수동 적인 행위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정보 들을 거짓된 것이며, 위험하고, 이단적인 악이라고 거부해 버릴지 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과 주위를 조작해서라도 자신의 현실에 대 한 견해에 맞춰가려고 할 것이다. 지도를 수정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새로운 현실을 파괴하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구태의연한 세계 관을 먼저 개편하거나 교정하기보다는 그 낡은 견해를 끝까지 지키 는데 막대한 에너지를 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대체로 그러하듯 전이를 다룰 때, 정신치료란 '지도'를 수정해 가 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들이 치료받으러 오는 것은, 그들의 지도가 분명히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적당한 지도에 매달려서 치료 경과의 단계마다 저항하기 일쑤다. 때로는 그 정도가 심한 나머지 치료가 불가능하게 될 때도 있다. 컴퓨터 기 술자가 꼭 이 같은 경우였다. 처음에 그는 토요일 시간을 요청해 왔 다. 그러나 이것은 3주 만에 끝났다. 토요일, 일요일에 정원 가꾸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목요일 저녁 시간을 제안했다. 그는 두 번 오더니 또 공장에서 잔업을 하게 되었다고 그만 두었다. 월요일 저녁에는 괜 찮을 것이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시간표를 조정해 주었다. 그러나 두 번 오고 나서는 월요일 저녁 잔업이 생겨서 또 못 오겠다는 것이 었다. 나는 이런 태도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얘기했다. 그는 자기가 잔업을 꼭 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 했다. 그러나 치료보다도 돈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중 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월요일 저녁에 잔업이 없을 때만 올 것이므 로 매주 월요일 오후 4시에 내게 전화를 해서 ㄱ나 제10

그의 '지도'가 옳은 것임을 인정해 주는 또 하나의 이정표를 표시한 채로 중단되고 말았다.
전이의 문제는 단순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들 간에 생기는 문제만 은 아니다. 이 문제는 부모와 자녀, 부부, 고용주와 고용인, 친구, 그 룹들, 심지어는 국가들 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국제적인 문제에서 전이의 문제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색해 보는 것 은 참으로 흥미있는 일이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들도 모두 어린 시절을 거쳤고, 그때 형성된 어린 시절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히 틀러는 어떤 지도에 따라 행동했을까? 미국 지도자들은 무슨 지도 에 따라 베트남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집행하고 지속시켰던 것일까? 분명히 그 지도는 다음 세대의 지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것이 다. 대공황 때의 국가적 경험은 그들의 지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 까? 또 1950, 60년대의 경험이 다음 세대의 지도에 어떠한 공헌을 했을까? 만약 1930, 40년대의 국가적 경험이 월남전을 치른 미국 지도자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 경험은 1960, 70년대의 현 실에 적절한 것이었을까?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는 피하게 마련이다. 우리 자신의 지도를 개편하려면 그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런 훈련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 현재의 편안함보다 궁극적으로 옳은 일들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진실 앞에 솔직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인 불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며, 현재의 진실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불편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정신건강은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오늘의 진실에 충실하려는 진행형의 과
정이다.

과감히 도전하자
진실에 충실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째로 이는 계 속적이고 끊임없이 엄중한 자기 성찰을 하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 는 우리가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 방식을 통해서만 세상을 알게 된 다. 따라서 세상을 알려면 우리는 세상을 잘 살펴볼 뿐만 아니라 동 시에 세상을 살펴보고 있는 자신을 살펴야만 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자신의 전이와 갈등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환 자들의 갈등과 전이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수련 과 정에서 배우게 된다. 이런 이유로 정신과 의사들은 훈련의 일부로 서 반드시 그들 자신이 먼저 정신치료나 분석을 받도록 장려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정신과 의사들이 이 방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다. 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세상을 신중하게 고찰하지만 자신들에 대해 서는 면밀하게 고찰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유능하다고 판단할지 몰라도 그들이 전부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다. 현명한 생 활이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생활이어야만 한다. 과거의 미국 풍속으로는 심사숙고하는 것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를 않았다. 1950

의 도전에 개방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돈을 지불해 가면서 다른 사람의 정밀한 조사와 판단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도전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정신치료를 받을 때도 꼭 필요하다. 정신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가장 용감한 행동이다. 사람들이 정신치료를 받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이다. 이 것은 많은 정신과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직책상 다른 사람 들보다 더 많은 치료가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치료를 불편하게 여긴 다. 그들도 이런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반 대로 많은 정신과 환자들은 외적으로는 치료를 받는 상태이기는 하 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도 근본적으로 강하고 건강한 사람인 이유는 치료받을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정신치료를 받는 것이 도전에 대한 개방의 극단적인 예라면, 평 상시 사람들과의 사교도 위험을 무릅쓰고 개방적 태도를 가져야 하 는 비슷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즉 시원한 물가에서, 회합에서, 골 프장에서 저녁식탁에 앉아서, 불 끄고 잠자리에 들어가서 등 모든 일상사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지배인과 종업원들, 친구와 친지들, 애인들, 부모들과 아이들이 함께 갖는 접촉에서 그런 기회가 생겨 난다.
머리를 단정하게 장식한 한 부인이 내게 치료를 받으러 왔는데, 어느 날 치료가 끝난 후 긴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 부인은 수선스럽 게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그녀의 새로운 행동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몇 주 전에 내가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 갔을 때 우리 남편이 내 뒷머리가 납짝해진 것을 발견했답니다."하

사실들은 슬그머니 빼놓는다. 어떤 부인은 한 시간 내내 자기 어렸을 때의 재미있던 경험들은 얘기했지만 바로 그날 아침에 은행에서 천 불이나 과다 인출했다는 사실 때문에 남 편과 싸운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환자들은 정신치료 시간을 일 종의 기자회견으로 취급한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시간을 허비하는 데 불과하며, 환자들은 미묘한 거짓말쟁이가 될 뿐이다. 개인이든지 단체이든지 도전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하려면 그들이 가진 현실에 대한 진짜 지도를 공개해서 반드시 공개심사를 받을 필요가 있다. 기자회견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에 충실한 생활의 세 번째 의미는, 정직한 생활이 다. 다시 말해서 진실과 현실을 우리가 아는 그대로, 가능한 한 정확 하게 우리의 대화에 반영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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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정직은 고통 없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거짓말하 는 이유는 도전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거짓말한 것은 네 살 된 아이가 어떻게 램프가 테이블에서 떨어져 깨졌는지를 어머니에게 거짓말 하는 것과 별다를 것도 없고 더 세련될 것도 없다. 마땅히 도전에 맞 •닥뜨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짓말하는 것은 당연히 겪어야 할 고통 을 우회해 보려는 시도로, 결국 그 때문에 정신질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거짓말은 '정당치 못한 지름길로 가서 문제를 빨리 해치우 려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우리는 어떤 장애를 우회하려고 할 때마 다 목적에 더 쉽고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 즉 지름길을 찾고 있 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이 인간 실존의 목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발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충실히 따르려고 한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은 정당하고 당연하 다. 그러므로 인간적 성장으로 가는 정당한 지름길을 찾는 것도 옳 고 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당하다'는 말이 다. 대체로 인간은 정당하지 못한 지름길을 찾아내려는 경향과 마 찬가지로, 정당한 지름길을 묵살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학위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원본 전체를 읽는 대신에 요약된 책으로 공부하는 것은 정당한 지름길이다. 만일 그 개요가 잘된 것이면 상 당한 시간과 노력을 절약해서 자료들과 기본 지식을 얻을 수도 있 다. 그러나 컨닝을 하는 것은 정당한 지름길이 아니다. 컨닝을 하는 것이 요약된 책을 보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성공적으로 시험 에 통과하여 학위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근본적인 지식
아직도

세계관과 종교
사람들은 훈련, 사랑, 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성장함에 따라 세계 와 그 세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이해도 성장하게 된다. 반 대로 사람들이 훈련과 사랑과 생활의 경험을 통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해심도 성장하지 못한다. 그 결과 사람들마다 인생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이해의 폭과 그 세련됨에 있 어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편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이해가 곧 우리의 종교이다. 비록 부정확하고 제한된 것 이라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이해(세계 관)를 가지고 있으므로 누구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 이다. 이 사실은 널리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종교를 너무 편협하게 정의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 다. 즉 우리는 종교란 반드시 신을 섬겨야 하며 어떤 의식이나 예배 집단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초 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종교적이 아 니라고 말하기 쉽다. 나는 학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들어왔다.

"불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라든가 "신비주의는 종교라기보다 는 철학이다. 등등. 우리는 종교를 커다란 원목에서 잘라낸 한 조 각처럼 일률적으로 보려고 한다. 이런 단순한 개념 때문에,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모두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또 때로는 정규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가톨 릭 신자보다 무신론자나 유태교도들이 기독교 윤리에 더 철저할 수 도 있음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다른 정신치료자들을 참관하면서 내가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환자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는 가에 대해 치료자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는 만약에 환자들이 자기는 신의 존재 를 믿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면, 그 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그 문제는 더 이상 정 밀한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사람은 세계의 본질적 성질에 대해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간에 일 련의 관념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근본적으로 혼돈스럽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환 자는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때 그때 즐 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느낀다. 또 세계란 비정하게 먹고 먹히는 곳 이라 믿는 환자는 세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무자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혹은 세계란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며 따라서 그곳은 좋은 것만 생겨나므로 장래에 대해 불 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어떻 게 이끌던지 세상은 살아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요, 또 대우주의 문 인가 하는 것이 . 제이다. 정말 주의하지 않으면 그의 목이 잘려나갈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는 스튜어트의 세계관은 그의 어린 시절 가정이라는 작은 우 주에서 볼 때에는 완전히 현실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두 사 람의 악한 어른들의 지배하에서 살았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이 악 한 것은 아니고, 모든 어른들이 악한 것도 아니다. 더 큰 세계관으로 볼 때, 세상에는 많은 다른 종류의 부모들이 있고, 많은 다른 사람 들, 사회들, 그리고 문화들이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종교나 세계관을 발전시키려면, 다시 말해서 최대한 현 실 세계와 그 안에서의 우리 자신의 역할에 부합되는 종교와 세계 관을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이해를 갱신하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해의 범 위를 확대시켜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지도 만들기와 전이의 문제
가끔 환자들의 어린 시절의 본질과 그에 따른 세계관은 그가 지닌 '최초의 기억'에 서 파악해 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환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기억할 수 있는 제일 첫 번째의 것이 무엇인지 내게 얘기해 보시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저항하면서 너무나 많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그 여러 기억 들 중에서 하나를 택해서 얘기해 보라고 강요하면 그 대답은 가지각색인데, "내가 기억 •하기는 우리 어머니가 나를 안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아름다운 해지는 광경을 보여 •준 것을 기억합니다."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부엌 바닥에 앉아서 오줌을 싸서 바지가
젖었다고 어머니가 숟가락을 쳐들고 흔들며, 내게 소리소리 지르던 일을 기억합니다."라 는 것까지 있다. 이런 첫 번째 기억들은 스크린에 나타나는 영상들처럼 빨리 스쳐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본질을 상징하는 정확한 기억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최초

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1부에서 상당히 깊게 논의한 바 있 다. 스튜어트가 가지고 있는 현실에 관한 지도는 그의 가족이라는 소우주 속에서는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른의 세계에까지 그 지도를 전이시켰다. 그러나 성인의 세계에까지 전이된 지도는 •부적절하며 결함투성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성인의 종교는
어느 정도는 어린 시절에서 전이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보다 더 좁은 이해 범주 내에서 살 아가므로, 개인을 둘러싼 특수한 문화, 부모, 어린 시절의 경험이 우 리 이해의 범주에 미치는 영향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 세계 가 이렇게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 은 서로서로를 접촉해야만 할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현실의 본 질에 관해서 굉장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견해가 각 개인 이 이미 경험했던 작은 우주관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개인마 다 자신이 지닌 견해가 옳다고 믿으면서 살고 있다.
더욱이 대개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을 충분히 깨닫지도 못하고 있 을 뿐 아니라, 그것의 유래가 되는 자기 경험이 독특한 것임을 깨닫 지 못하고 있다.
브라이언 웨지라고 하는 정신과 의사는 국제관계 분야의 전문가 로서 미국과 소련과의 협상들에 대해서 연구했다. 그 결과 그는 인 간 존재와 사회, 세계의 본질에 관한 소련인과 미국인들의 기본적 인 가정들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가정들이 양측의 협상하 는 태도를 좌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편 모두 상대방이 다른 가정 위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자기 측의 가정도 제대로 모

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소련과 미국, 양측 모두 상대방의 협상하는 태도를 미치광이짓이라고 보거나 고의로 악랄하게 행동하는 것이 라고 간주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속 담에 나오는 세 장님들과 같다. 각각 자기가 만지는 코끼리의 일부 분을 가지고 그 동물 전체의 본질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 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작은 우주의 세계관을 가지 고 논쟁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러한 모든 전쟁이 성전(聖戰)이 되고 마는 것이다.

종교로서의 과학
정신적 성장이라는 것은 작은 우주에서 출발하여 보다 더 큰 우 주로 들어가는 여행이라고 하겠다. 초기의 단계에서는 그것이 인식 의 여행이지 신앙의 여행은 아니다. 우리가 가진 이전의 경험들로 이루어진 작은 우주로부터 탈피하고, 또 전이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해서 인식망을 확장하고 시야를 넓혀가야만 하는데, 이런 것은 새 로운 정보들을 세세하게 소화하고 통합함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 이다.
인식을 넓히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주된 주제다.
앞에서 사랑은 자기 확장이라고 정의하면서, 사랑의 모험들 중에 서도 미지의 새로운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훈련에 관한 첫 부분의 마지막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은 오래 전에 형성된 낡은 자신을 포기하고 낡아빠진 지식을 죽이 는 것을 요구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우리가 넓은 시야를 발달시키 기 위해서는 기꺼이 좁은 시야를 죽여야만 한다. 단기적으로 볼 때
아직도 가야 한

는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평안할 것이다. 즉 우리가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그대로 작은 우주관으로 그려진 지도를 사용 하고, 숭배해 오던 자신의 의견들을 말살시키는 고통을 피하는 것 이 더 편하다. 그러나 정신적 성장의 길은 반대 방향에 놓여 있다. 우리는 낡은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며, 두렵고 익숙하지 않 은 것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이전에 배워 깊이 간직하고 있던 가 치관에 과감히 반기를 듦으로써 정신적 성장을 시작한다. 성스러움 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다.
실제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는 과학으로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부모들의 종교를 과학이라는 종교로 대치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부모들의 종교에 반항하고 거부해야만 하는 이유 는 그들의 세계관이 우리가 능력껏 성취할 수 있는 세계관보다 더 좁은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 경험을 충분히 잘 이용하고, 여기에 성인의 경험을 포함하고, 또 앞으로의 신세대의 경험을 추가한다면 우리는 더 넓 은 세계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형태로 물려 내려오는 종 교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생동적이며, 우리에게 가능한 한 최선 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어야만 한 다. 이 말은 현실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경험하면서 불처럼 타오르 는 회의와 의문을 통해서 빚어지고 굳어진 개인적인 것이라야만 한 다는 의미이다. 신학자인 알란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가진 문제 중의 하나는 우리 중의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이 독특한 개인 생활을 발달시켜 왔다는 것이다.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으로 보이고 우리의 감정까지도 그렇게 보인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활동하기 위해서 간접적인 정보에 의존해야만 한다. 나는 의사, 과학자, 농부의 말을 신뢰한다. 내가 잘 알지 못하 는 어떤 부분에 대해 살아 있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콩팥에 대한 상태, 콜레스테롤의 영향에 관해서, 또 닭을 기르 는 데 관해서라면 간접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삶 의 의미, 목적, 죽음이 문제가 될 때에는 간접적인 지식은 소용이 없다. 나는 간접적인 하느님에 대한 간접적인 신앙을 가지고 생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자신만의 개인적 인 언어와 특수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신적 건강과 정신적 성장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 의 종교를 발달시켜야만 하며 부모들의 종교에 의존해서는 안 된 다. 그런데 도대체 이 '종교로서의 과학 이란 무엇일까? 과학을 일 종의 종교로 보고자 하는 것은 과학이 여러 가지 중요한 신념을 가 진 굉장히 복잡한 하나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신념들 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즉 세계는 실재하며, 따라서 관찰할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이다. 인류가 세계를 시험한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세계에는 원리가 있다. 즉 세계는 어떤 법칙을 따르고 있으 므로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편견이나 미신을 따르고,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려고 하는 뿌리 깊은 나 쁜 버릇을 가진 나약한 연구자다. 그러므로 정확히 고찰하고 이해

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훈련을 쌓 아야 한다. 이러한 훈련의 핵심이 경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제 로 그것을 경험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생각할 수가 없 는 것이다. 과학적인 방법을 쓰는 훈련이 경험으로 시작되지만, 단 순한 경험 그 자체만을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실험의 형식으로 반복되어져야만 한다. 더욱이 그 경험 은 정당성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처지에서 똑같은 것을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기본 개념이 되는 말은 '실제', '조사', '지식', '의심', '경험', '훈련' 등이다. 이 말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이다. 과 학은 회의의 종교이다.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소우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문화라는 소우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또 부모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반쪽 진리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배워 온 것에 대해서 회의를 품어야 한다. 이것이 기본적인 태도다. 과학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소우주의 경험을 대우주의 경험으로 변경시킨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학자가 되는 것으 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이미 이런 시작을 한 많은 환자들이 내게, "나는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나는 교회를 안 다닙니다. 나는 더 이상 교회와 부모들이 얘기해 준 많은 것들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부모가 가졌던 신앙을 버렸습니다. 아마도 나는 그다지 영적
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한다. 자신이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 주면 그들은 흔히 충격을 받는다. 그때